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줄거리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는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간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보금자리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던 ‘마히토’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왜가리 한 마리가 나타나고, 저택에서 일하는 일곱 할멈으로부터 왜가리가 살고 있는 탑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히토’는 사라져버린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탑으로 들어가고,
왜가리가 안내하는 대로 이세계(異世界)의 문을 통과하는데…!
참조 - 나무위키
간략 내용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어 병원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주인공 '마히토'와 새 출발을 하게 된 아버지는 어머니는 동생 '나츠코'와 재혼을 하게 되어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오게 되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쉽사리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왜가리가 나타나 탑에 대해 알게 되며 호기심으로 다가가지만, 저택에서 같이 지내게 된 할멈으로 부터 그곳을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곳을 적응하지 못하는 '마히토'는 다시 한번 왜가리를 찾아가게 되고,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왜가리의 속삭임에 이성을 잃을 뻔 한 '마히토'를 구해 준 것은 새 엄마 '나츠코' 였다.
그렇게 '마히토'는 왜가리를 잡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임신을 한 새 엄마 '나츠코'가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고 그 후 행방불명이 된 '나츠코'를 찾기 위해 '마히토'는 왜가리가 있을 것 같은 탑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나츠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마히토'는 왜가리의 안내에 이세계의 문을 통과하여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마히토'는 수많은 상황을 경험하고, 극복하며 성장을 해나가며 새 엄마 '나츠코'를 받아들이며 함께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감상
지브리에서 옛날 그 느낌이 담겨 있을 만큼 영화와는 별개로 옛날 감성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 기대와 후기를 봤을 땐 내용 자체가 난해하고 철학적인 내용이라고 하였을 땐 나는 내용에 대해 더욱 이해하고 싶어 많은 글을 보았으며, 결국 영화를 본 후의 내 모습은 정말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난해하다고 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의 생각을 말해보자면, '마히토'의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엄마와 닮은 엄마의 여동생 '나츠코'를 새 엄마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들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아빠 마저 자신이 아닌 새 엄마한테 빼았겼다는 감정을 받았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새로운 학교를 가게 된 '마히토'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친구들과 일부로 가벼운 싸움을 한 뒤 자신에 머리에 돌로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을 볼 땐 아직까지 어린 '마히토'가 아빠한테 관심을 받기 위한 행동이지 않았나 싶다.
또한, '마히토'는 엄마를 지켜주지 못한 자책이 있었을테고 그런 상황에 '나츠코' 마저 행방불명이 되어 이번만큼을 꼭 구하겠다는 어린아이의 갑작스러운 성장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갑작스러운 성장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아이 같지 않는 어른스러운에 대한 안타까운 의미를 말한다.
하지만 '나츠코'를 찾기 위해 넘어간 이세계에서 겪게 되는 경험으로 자신을 지켜주고 있던 일곱 명의 할멈의 목각 인형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수많은 과정을 거치게 되는 와리와리, 그리고 그걸 막는 펠리컨을 보면 삶의 소중함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생명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그 생명을 밟아야지 살 수 있는 생명,
관점의 문제로 둘 다 소중하다고 본다.
앵무새 또한 그렇다고 본다. 결국 그들은 탑 안에서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결국 탑 밖에서 태어나면 그저 새일 뿐인 생명이다.
결국 사람은 언제간 죽고 또 태어난다. 여기서 '마히토'는 생명에 대해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죽은 엄마와 곧 태어날 동생 그리고 새 엄마
그렇게 '나츠코'와 첫번째로 재회 했을 때 드디어 엄마로 인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큰 할아버지와 만남을 가지게 되며, 후계 제안에 관련하여 '마히토'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후계 제안을 거절한다.
이건 '마히토'가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현실에 대해 도망가지 않고 받아들이는 성숙함을 볼 수 있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목 그대로 '마히토' 모험으로 점점 성장한 것 처럼 우리들에게 제목 그대로의 의미를 전달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가 중요한게 아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까지 그대로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지?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한 의미는 이러하다. 결국 정답은 없다고 보며 각자 느낀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해석도 다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해석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가갔을까? 라는 궁금증에 여러 사람들이 작성한 해석을 보았다.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야기가 있어 얘기해볼려고 한다.
내가 해당 영화를 보기 전 많은 후기를 보았고, 그 중에서도 이번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서전이라는 글을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해당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나는 해당 작품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라는걸 몰랐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을 보면 탑이 무너지는 장면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제까지 자신이 지브리로서 달려온 세계에게 안녕을 고한 것이라고 얘기하였고, 내 뒤를 잇지 않아도 상관 없어. 그렇지만, 네가 왜 바깥의 세계로 나왔고 어떤 말들을 하고 싶은지, 네가 그토록 두려워 했던 애무새들은 밖으로 나오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과 함께 생각 해봐.
영화란 영화관 안에선 큰 울림을 주지만, 아쉽게도 결국 영화관 밖으로 나가면 무력하게도 작아진 비단 앵무새와 같다. 실제로 바뀐 현실은 없다. 그래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영화관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영화의 일부이며, 문을 열고 관객들이 줄지어 나가며 우리는 영화를 보는 '마히토'에서 앵무새로 변해버린다고 한다.
해당 내용을 보았을 땐 정말 그가 말한 듯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였나 싶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석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백 투더 퓨처>이자 <소울>이고, 동시에 이제까지의 하야오작 지브리 영화들을 기워 만든 담요 같은 영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독 바다와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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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링크는 방금 말한 글쓴이가 올린 블로그이다.
그가 정의한 해석에 대해 궁금하다면 직접 들어가서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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